[신문 읽어주는 교수님] 광주학생독립운동, 100년의 역사와 그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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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가 뉴스] [신문 읽어주는 교수님] 광주학생독립운동, 100년의 역사와 그 가치 2024/11/27

응용미술교육과/김혜원 2024/11/27 추천 0 / 신고 0 조회 :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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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식민 통치 불의에 항거했던 11·3학생독립운동
전국 6만여 명 학생 참여한 대규모 독립운동
"물리적 힘이 아닌 정의가 승리함을 보여줘"

 

2024년 11월 3일, 일제 식민 통치의 불의에 항거해 일어난 광주학생독립운동이 발생한지 95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1929년 10월 30일 광주에서 나주로 향하는 통학 열차에서 일본 남학생이 조선 여학생을 희롱한 일이 발단이 돼 학생 중심으로 일으킨 항일민족운동이라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학생들의 항일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돼 320여 개 학교의 학생들이 참여한 대규모 독립운동이다. 3·1운동, 6·10만세운동과 함께 3대 항일투쟁으로 인정되는 학생독립운동은 그 의의와 일제 식민 통치에 맞선 학생들의 독립정신 계승이 긴요하다.

다가오는 광주학생독립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이달 7일 열린 ‘광주학생독립운동 역사현장 보존과 활용’ 심포지엄에서 해당 운동의 전개과정과 역사적 의의를 알린 박찬승 사학과 명예교수를 만나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역사와 가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 박찬승 사학과 명예교수는 2022년까지 17년간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는 ‘광주학생독립운동 역사현장 보존과 활용’ 심포지엄에서 기조발표로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전개과정과 역사적 의의를 알렸다. ⓒ 김경하 기자
▲ 박찬승 사학과 명예교수는 2022년까지 17년간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는 ‘광주학생독립운동 역사현장 보존과 활용’ 심포지엄에서 기조발표로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전개과정과 역사적 의의를 알렸다. ⓒ 김경하 기자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전개

광주학생독립운동은 1929년 11월 3일 일어난 첫 번째 봉기에서 시작됐다. 초기에는 광주 및 전라남도 지역에서 발생했으나, 이후 서울을 포함한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당시 학생들은 주로 '구속 학생 석방'과 '식민지 노예교육의 철폐'를 외치며 일제의 억압적인 교육 체제에 저항했다. 이들은 일본사·일본어·일본 문화 중심 교육을 '노예교육'으로 간주하고 조선 역사와 언어 교육을 강화할 것을 요구했다. 

▲ 1920년대 초 학생들은 일본인 학교와의 시설 차이, 총독부의 교육비 보조금 차이 등 노예교육에 맞서 동맹 휴학(맹휴)을 일으켰다. ⓒ 게티이미지
▲ 1920년대 초 학생들은 일본인 학교와의 시설 차이, 총독부의 교육비 보조금 차이 등 노예교육에 맞서 동맹 휴학(맹휴)을 일으켰다. ⓒ 게티이미지
 

학생들은 비밀 서클을 조직해 사회과학 서적 등을 공부하며 민족 의식을 고취시켰다. 이러한 학습은 20세기 초 한국 사회에서 학생들이 주체가 돼 사회적 변화를 이끌어내고자 하는 시도로 볼 수 있다. 박 교수는 “광주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1920년대 후반부터 이어진 학생 운동의 연속선상에 있다”며 "학생들이 노예교육에 맞서 사상과 학문의 자유를 요구했다"고 설명했다.
 

운동의 내용과 확대

광주학생독립운동은 1930년 3월까지 약 300여 개의 학교에서 6만여 명의 학생들이 참여한 대규모 독립운동이다. 박 교수는 당시 학생들이 외친 구호들을 해석하며 "처음에는 '피압박 민족해방 만세'라는 구호가 파급돼 나갔고, 이것이 결과적으로 '조선 독립 만세'로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과정은 학생들의 복지와 인권, 그리고 저항의 의지가 결합된 결과라 볼 수 있다.


 

▲ 1920년대 후반 원산총파업, 신간회 민중대회 등 당시 국내 민족운동은 집회의 자유 억압으로 침체돼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 학생들은 학교 등에서 집회를 이어가며 광주학생운동의 전국 확산을 이끌었다. ⓒ 게티이미지
▲ 1920년대 후반 원산총파업, 신간회 민중대회 등 당시 국내 민족운동은 집회의 자유 억압으로 침체돼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 학생들은 학교 등에서 집회를 이어가며 광주학생운동의 전국 확산을 이끌었다. ⓒ 게티이미지


특히 서울에서의 학생 시위는 광주학생운동의 전국 확산에 중대한 역할을 했다. 광주청년회 장석천 학생이 서울로 올라가 광주의 상황을 전하고, 서울 청년총동맹(전국 청년회 집합 단체)이 이를 지원하면서 여러 도시에서 동조 시위가 벌어졌다. 학생들의 이러한 활동은 비단 광주 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국민적 연대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11·3학생독립운동, 학생들의 빛나는 투쟁의 역사

박 교수는 "광주학생운동이라는 용어보다는 11·3학생독립운동으로 부르는 것이 더 적합하다"며 운동의 상징성을 강조했다. 그는 독립운동의 주체가 단순히 학생에서 더 넓은 범위로 확장됐음을 지적하며 이후 민중운동으로의 파급 효과를 분석했다. 이는 3·1운동과 맞물려 한국 독립운동의 한 축을 이루며 이후에도 중요한 기억으로 남아야 한다.

박 교수는 "광주학생운동이 현대에 있어서도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전하며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기억하고 기념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역사 속에서 물리적 힘이 아닌 정의가 승리함을 보여주고 있다”며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는 이들의 희생과 저항을 통해 이뤄진 것임을 환기시켰다.


▲ 광주학생독립운동은 근대 이후 민주주의의 핵심인 자유의 보장을 외치며 시대적 정의를 지켜냈다. ⓒ 게티이미지
▲ 광주학생독립운동은 근대 이후 민주주의의 핵심인 자유의 보장을 외치며 시대적 정의를 지켜냈다. ⓒ 게티이미지
 

광주학생독립운동은 단순한 지역적 사건이 아닌 한국의 현재·미래의 평화와 자유를 향한 중요한 발자취로 자리잡고 있다. 과거의 아픔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은 건강한 민주주의를 이어가는 데 필수적인 자세일 것이다.


출처: https://www.newshyu.com/news/articleView.html?idxno=10165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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